작년 또는 재작년 어느 휴일이었던 것 같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산책을 나가다가 아파트 재활용 쓰레기장에 홀로 서있는 독서실 책상과 마주쳤다.
서울대 박사라는 사람이 집에 책상도 없어서 되나? 사대가 함께 살게되면서,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번뜩 떠올랐다(그때는 꼬맹이 증조할머니도 함께 계셨다).
발 아래 선반이 조금 망가졌지만, 밝은 색의 책상이 우리방, 그리고 꼬맹이 주방놀이 장난감과 찰떡같이 잘 어울린다.
아버지는 재작년까지 군장교이자 법대출신 헬기조종사셨다. 내 평생 마음속 깊은 자랑이자, 지금도 영원한 멘토는 아버지다.
어린 시절에는 끝없이 공부만 하시는 아버지가 답답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정말 학자가 되셨어야하는 분이었다. 아버지 앞에서 나는 영원한 날라리인 것 같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결국 내가 박사졸업이라는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어린시절은 잘 몰랐다.
군조종사셨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6번의 전학을 하고 7번째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친구들과의 헤어짐이 익숙하고, 혼자인 시간에 조용히 책을 보는 어린이로 자랐다.
하지만, 사춘기가 다가오면서부터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들이 겪는 감정을 나도 겪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계속 '나때는'과 '내가 너라면'을 얘기하셨고, 수많은 전학이 내 방황의 핑계가 되었다.
그리고 수능을 크게 망치면서 스스로에 대한 좌절과 상처로 성인기를 시작했다. 그냥 아버지는 이제 영원히 나를 인정하시지 않겠지라는 생각이 깊은 곳에서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학생활은 아무 재미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듣게 된 전공선택 수업에서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수업이 나의 석사 지도교수님과의 인연을 만들어주었다. 지금도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대기업 임상시험을 도맡아하신 지도교수님 밑에서 조교와 연구원을 하면서, 학비와 용돈을 벌면서 석사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년 간의 실험실 테크니션 생활을 마치고, 서울대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석사 때의 경험으로 바로 연구에 참여할 수 있었고, 덕분에 박사과정 때에도 3번의 전액장학금과 연구비로 용돈을 받고면서 4학기에 조기 수료할 수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실험하고 연구계획서 써서 연구비따고, 실험 세팅하고, 행정업무하고, 보고서쓰고, 이런 프로젝트를 동시에 4개 이상은 해야 연구실이 돌아간다. 후배들 연구와 논문도 바줘야하고, 내 논문도 써야하고, 강의도 해야하고, 끝이 없는 일의 연속이다. 이렇게 5년을 살았다.
그저 등록금내고, 본인 연구만하고 졸업하는 다른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누가 겪어보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나는 이제 새로운 연구가 두렵지 않다. 못할 것은 없다는 지도교수님 말씀도 알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시절부터 성인이되면 독립해야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나의 끈기, 책임감, 또는 근성을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은퇴하신 지금도 하루를 배움 없이 보내지 않으시는 아버지께 감사하다.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자격지심, 그리고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자책도 하지 않는다.
이제는 어떤 제약회사 임상설계도 어느 의대 논문도 주저하지 않고 자문한다. 이번 연구자가 나에게 어떤 복잡한 질문을 던져줄지 궁금하다.
아버지 오늘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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